📕 Script: [[사도행전 9]]:1-9

🔦 Highlight (관찰)
사도행전9: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 Explain (해석)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참했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사울은 유대인들이 따르던 율법과 그 규정(할라카)에서 벗어나 ‘다른 도’를 따르는(2절) 사람을 찾아 남녀를 막론하고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는 일을 하고자 했다. ‘다른 도’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을 따라 행하는 ‘성령의 도’를 의미할 것이다.

사울이 다메섹에 가던 것은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받기 위해서였다(2절). 사울이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자들을 잡아 예루살렘에 끌고 가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메섹에서 공식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 성은 로마 제국이 아니라 파르티아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르티아에서는 그 제국 내의 유대인들과 관련된 일들은 공회의 책임 아래 두고 있었다. 따라서 사울이 유대인들을 잡아가기 위해서는 공회의 허가서가 필요했다. 이처럼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핍박하는데 철저했다. 모든 것은 합법적이었다. 사울은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의로운 자였고, 불의한 자들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사울은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 경험을 하게 된다. 빛과 함께 하늘로 부터 나는 소리가 있었는데, 그 소리는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들었으나 이해할 수는 없는 음성이었다.

“사도행전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사울에게 나타나신 분은 5절에서 자기 스스로가 누구이신지 밝히신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신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했다. 이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재판에 넘겨주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나 단 한번도 자신이 예수를 핍박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바로 이 대화를 통해 바울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주님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다. 성도들은 그 지체를 이룬다. “골로새서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사도행전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울은 주님과의 이 만남을 통해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주님과의 만남은 사울에게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그의 일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 그의 신념이 무너졌다. 그의 열심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박해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 의로운 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울은 마침내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된다.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는 사울 자신의 영적 상태였다. “디모데전서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Apply (느낌)
자신을 의롭다고 믿었던 사울은 열심을 다해 자신의 신념대로 행했다. 신념을 가진 사람은 힘이 있다. 앞을 향해 돌진한다. 삶의 분명한 목표가 있기에 그 일을 행할 때 주저함이 없다. 사울은 그렇게 살았다.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그가 핍박하던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 짧은 만남은 그의 신념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사람은 언제, 어떻게 변화될까? 사울의 만남은 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근본적 답은 이 만남에서 찾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사람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 가운데 자기 생각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그리스도의 길로 돌이키는 것이 쉽지 않다. 자신의 경험과 신념이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신념과 그에 따른 확고한 삶이 이들의 인생을 구원해 줄 수는 없다. 하나님 없는 모든 것은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참된 의미를 찾게 된다. 스스로 꽤 괜찮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실상은 영적인 소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모든 것은 무너진다. 그리고 바로 그 무너진 자아의 폐허 위에 그리스도께서는 마침내 하나님의 꿈을 건축하신다.
오늘도 나는 나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조금이라도 사울과 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길에서 멀어져있지 않은지 돌아본다. 목회자로서 나는 주님의 손에 온전히 붙들려 있는가 아니면 어느새 내 경험과 지혜를 의지하며 주님의 손에 고통을 주는 가시 돋히고 모난 연장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 Response (적용)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교회다. 주님께 붙어 있기에 주님의 것이다. 내가 섬기는 이들이 내게 맡기신 성도들이 곧 그리스도가 돌보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다.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고, 더욱 그리스도를 닮도록 이끌자. 교회와 목회와 성도들에 대한 내 경험, 내 신념이 혹시라도 사울과 같이 나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변질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며 기도한다. 사울에게 사흘간의 흑암 속의 기도가 필요했듯이 나에게도 지금 이 시간이 그와 같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다. 깨어지지 않으면 변화되지 않는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