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cript: [[사도행전 11]]:1-10

🔦 Highlight (관찰)
사도행전11: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사도행전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 Explain (해석)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구원받게 된 사실을 들었다. 이 일은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베드로 보다 먼저 그 소문이 예루살렘에 전해졌다. 그리스도를 믿은 유대인 신자들 중에는 율법의 문자적 순종을 중시하는 바리새파 사람들도 있었을 것인데, 이들을 중심으로 베드로가 율법을 어기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함께 교제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일이 발생했다.

누가는 베드로를 비난하는 이들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할례자와 무할례자로 자신을 구분한다. 자신들은 할례자이지만 이방인은 무할례자이기 때문에 이들과 교제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무할례자와 어울린 일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를 공격했던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들 역시 예수님을 이방인과 마찬가지인 세인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율법의 말씀은 순종하나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불순종하는 자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얼마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본래 의도에서 멀어져 있는가를 산상설교를 비롯한 여러 말씀에서 분명히 지적하셔야 했다.

성령께서 임하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교회를 이룬 유대인들 중에는 아직도 이와 같은 율법적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이 있었다. 사도인 베드로 역시 율법의 형식을 준수하는 일에서 아직 자유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 내에는 지금까지 지켜오던 율법과 복음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확실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께서 그들에게도 임하심으로 구원의 보증이 되셨다는 사실은 당연히 온 교회가 함께 기뻐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대신 베드로를 비난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데 교회는 화를 내고 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한 영혼이 구원받음으로 천국에서 잔치를 벌이시는데, 교회는 율법을 따지면 재판을 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를 비난하는 유대인 신자들이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려면 할례를 먼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할례는 언약 백성의 표징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신 이후(“창세기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남자라면 누구나 순종해야 할 절대적 명령이 되었다. 유대인 공동체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이방인들 역시 할례를 받아야만 했다(“창세기17: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이 만약 교회 안에 들어오려면 (그것을 막을수는 없다 하더라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육체의 할례를 구원받은 징표로 주시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할례를 통해 기억하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었다. 할례가 구원의 보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모세도 신명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히 경고했다. “신명기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아직도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 신자들은 복음의 시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율법에 얽매여 있었다.

💡 Apply (느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교회가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일은 안타깝지만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관심과 교회의 관심, 성도들의 관심이 다른데 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 구원받게 된 사실을 기뻐하시는데, 유대인 신자들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 교회에 들어오게 한 것을 비난하며 화를 낸다. 교회 안에 있어도 같은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이와 똑같은 잘못을 오늘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정말 알고 있다면, 우리의 가장 소중한 가치와 분명한 목표는 영혼 구원에 있어야 한다. 율법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 형식적 순종 때문에 영혼이 구원받은 일을 기뻐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은 것이다. 다시 한번 나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고 있는지 나 자신을 살피게 하신다.

⚡️ Response (적용)
하나님의 행하심의 모든 동기는 사랑이다.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내셨다. 유대인 신자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고 그 벽을 허물어야 했다. 그래야 교회가 복음을 들고 이방인에게까지 이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초대교회 당시의 유대인 신자들과 같은 모습이 있지는 않은가? 나와 신앙 배경과 컬러가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교회 공동체 내의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화를 내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일은 좋아하며 행하는 상태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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