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cript: [[사도행전 4]]:1-12
🔦 Highlight (관찰)
사도행전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Explain (해석)
말씀을 듣고 믿다
평생 걷지 못하던 병자가 치료되는 기적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 주위에 몰려들었다. 사도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기적이 갖는 의미를 선포한다. 사도들이 증거한 말씀을 들었을 때 백성들 가운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사도행전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2장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후에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약 삼천 명이 신도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오천명이 교회에 더해졌다. 이렇게 성령이 임한 첫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세상과 충돌하는 교회
그런데, 이렇게 성장하는 교회를 사탄이 그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 교회를 향한 핍박이 시작되는데, 이와 같은 세상과의 충돌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다.
산헤드린 공회의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에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는가?”(7절) 라고 묻고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자신이 한 “이 일”, 즉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된 이 장애인을 낫게 한 일은 “착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착한 일은 바로 그들이 십자가에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권세로 된 일이라고 대답한다(10절).
종교 지도자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사도들이 행한 “착한 일”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저는 자가 걷고 뛰며, 눈먼 자가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게 된다고 하더라도 종교 지도자들은 이 “착한 일들” 때문에 사도들을 심문하고, 감옥에 가두고, 심지어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사도들이 행한 이 “착한 일”이 누구의 이름, 무슨 권세로 행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분명하게 설명한다. ‘이 일이 무슨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되어졌느냐고 물었는가? 그렇다면 대답해 주겠다. 잘 들어보라! 이 일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들이 얼마전 십자가에 달아 죽인 바로 그분의 이름과 권세로 행하진 것이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1-3절)
왜 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싫어했는가? 사도들이 행한 “착한 일”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달아 죽인 “바로 그 예수 안에 죽은자의 부활이 있다”고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고 전도했기 때문이다. 만약 사도들의 이 말이 사실이라면, 종교 지도자들은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것이 된다. 이 사실은 그들이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이야말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죽어 마땅한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되지 않겠는가?
복음이 무엇인가?
십자가에 종교 지도자들이 달아 죽인 예수가 부활했고, 그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와 같이 부활하게 된다는 이 선명한 메시지가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용서함을 받게 되면,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나게 된다. 이 세상에서 거듭남을 경험하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부활한다.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가 바로 이 복음, 이 기쁜 소식이었다.
세상은 예수를 거절하고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오직 그를 통해서만 구원받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이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들만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복음은 사람들을 선명하게 가른다. 복음을 믿고 영접하여 구원받는 자들이 있고, 그 복음을 거절하고 멸망의 길로 가는 자들도 있다. “착한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이 구원과 멸망을 가름한다. 따라서 선행과 복음 전도 중 항상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복음 전파이다. 교회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착한 일은 그 목적이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 Apply (느낌)
영혼 구원은 육신의 치유와 비교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진다. 베드로와 요한이 치유한 한 사람은 그 육신이 치유되자 즉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을 목격하고 그 의미를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깨닫게 된 사람들은 그 말씀을 믿고 구원에 이르렀다. 남자만 무려 오천 명이 이 치유의 기적 하나로 구원받게 된 거이다. 한 사람의 치유가 오천 명의 회심을 이끌었다.
치유와 기적은 선한 일이고 착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이다. 초대 교회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기적을 통해 육신을 치료하고, 빵을 주어 배고픔을 해결하고,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착한 일’이다. 교회는 이와 같은 세상을 섬기는 일을 계속해서 행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면 안 된다. 목적은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에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빠진 선행은 껍데기일 뿐이다. 그 자체로 유용하고 선하지만 복음 없이는 육체는 치유할 수 있어도 영혼은 구원할 수 없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 Response (적용)
우리 교회는 EECM과 함께 이웃을 섬기는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이 일을 선한 일이다. 그러나 항상 기억할 것은 이 일을 통해 구원받는 자들을 세워주시길 기대하며 사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는 순원들의 손길 가운데 이들의 육신적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을 넘어, 음식을 먹는 한 영혼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한 기도가 함께 해야 한다. 영혼의 구원을 위한 음식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팬데믹을 지나면 우리 교회는 더욱 더 힘써 ‘착한 일’을 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할 것이다. 주님의 이름 외에는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